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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 허준에 대한 궁금증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허준(許浚)은 조선 중기 때 사람으로 자(字)는 명국(明國), 청원(淸源)이고, 호(號)는 구암(龜岩)이다. 왕을 치료하는 어의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동의보감』을 저술하였고, 당시 최고의 벼슬이던 정일품 '보국숭록대부'에 오른 조선 최고의 명의이다. | 이러한 화려한 행적에 비해 그의 출신이나 의학을 배우게 된 동기를 밝혀줄 수 있는 자료는 매우 빈약하다. 의사 과거시험인 의과에 합격한 의관의 출신과 가족관계를 기록한 『의과 선생 안(醫科先生案)이나 의과 팔 세보(醫科八世譜)』, 『의과 방목(醫科榜目)』에도 허준에 관한 자료는 빠지어 있다. 자세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관련 자료가 소실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지금 허준의 생애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양천 허씨 문중의 족보(허 씨래 정보, 양천 허 씨 세 보, 양천 허 씨 내 금융공기업 파보)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그리고 당시 양반들이 저술한 개인 문집에 언급된 일부 자료에 국한된다. | 전문 직업인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지위와 명예를 누렸던 인물 치고는 개인 자료가 너무 빈약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때문에 후대
에 와서 그의 삶이 일부 과장되기도 하고, 신격화되기도 하였다.
유의태라는 참스승을 통해 신비로운 의술을 배웠고, 자결한 스승의 몸을 해부하여 마침내 스승을 능가하는 의술을 터득했다는 설화의 주인공 허준, 지금부터 약 450년 전 허준의 탄생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는 손부인 것으로 알려진 손희조(孫熙祖)와 혼인하였지만 생기지 않았다. 결국 수 없는 첩을 얻어 허옥(許沃)과 허준을 낳았다. 그리고 후에 손부인 이 적자인 허장(許)을 낳았으므로 모두 삼 형제를 둔 셈이 됐다. | 양천 허씨 집안의 족보에는 허준이 명종 원년(1546년) 3월 5일(음력), 경기도 김포시 양천 면 공암리(현 서울시 강서구 가양동 부근)에서 양 반에 속하는 무인 집안의 서자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해 준 이 훗날 임진왜란 때의 공로로 호성공신으로 봉해졌을 때 그려진 공 신도에는 허준의 출생이 이보다 7년 빠른 중종 34년(1539년)에 출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족보의 잘못일까? 아니면 공신 도를 그린 화가의 살 수였을까?


의학 입문의 배경 허준은 양천 허씨 집안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족보에 의하면 허준의 조상은 원래 가락국의 왕족이었다고 한다(양천 허 씨 내 금융공기업 파보), 신라에 나라를 빼앗기자 허 씨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이 중에서 허준의 20 대 조부인 허선문(許宣文)이라는 사람이 서울 근처의 공암(孔岩 : 현 강서구 가양동)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다. | 허선 문은 공암에서 농사일에 전념하여 많은 식량을 비축하고 있었다. 때마침 견훤과 세력 다툼을 벌이던 고려 태조 왕건이 군량미가 떨어져 고생하고 있다는 소문이 공암에까지 퍼졌다. 허선 문은 곧 배에 곡식을 싣고 가서 왕건을 후원하였고, 왕건은 후백제와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에 왕건은 허선 문에게 공암 촌장의 벼슬을 내리고, 그의 자손들에게 양천(陽川)이란 본관을 쓰도록 하였다. 이런 이유로 허선 문은 양천 허 씨 집안의 시조가 되었다.
그의 자손들은 대대로 고려의 문관 벼슬을 지냈다. 4대손인 허정(許 正)은 예부시랑을 지냈고, 14대손인 허금(許錦)은 전리사판서를 역임할
허준의 어린 시절과 의학을 배우게 되는 동기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아주 어렸을 적부터 의학을 배우기 시작했을 것이라는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왜냐하면 허준이 명의 대접을 받으며 서울 양반들의 질병을 치료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유희춘이라는 양반이 쓴 일기인 미암일기초(眉巖日記草)에 젊은 날의 허준이 등장한다. | "어제 얼굴의 왼쪽 뺨에 종기가 하나 났다. 그래서 오늘 허준에게 치료 방법을 물어봤다. 그가 지룡즙(地龍汁: 지렁이 고약)을 바르라고 해서 발랐더니 신효하게 나았다.” (선조 2년 1568년 6월 29일 자)
몇 번 효험을 본 유희춘은 허준을 집안 주치의로 대접하고 지속적인 진료를 받았으며, 주변의 친구들에게 허준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런 소문을 듣고 허준에게 진찰을 받았던 사람은 송순(宋純)을 비롯하여 서울
면에서 문정공(文正公)의 시호를 받기도 했다.
왕조가 바뀌면서 자손들은 문관을 버리고 무예를 닦아서 무관 벼슬을 지냈다. 허준의 할아버지인 18대손 허공(許)은 연산군 10년(1504년)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경상 우수사에 올랐다. 그의 차남인 허로(許 S)는 아버지의 은덕으로 용천 부사를 지냈다. 그

에 사는 양반들이 대부분이었다. | 이러한 내용은 개인의 문집이나 일기에 등장하므로 신뢰성이 높다. 약관 23세의 허준이 서울에서 명의로 소문이 날 정도였다면 그의 의학 입문은 매우 빨랐을 것이다.
허준의 집안 내력을 살펴보면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조선 최고의 명의를 탄생시킨 집안에 의사가 한 명도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대대로 문관 또는 무관을 지낸 양반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양반들은 출신 성분이 낮은 의사들을 천시하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자손들이 의학을 배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2
허준은 왜 천대받던 의학을 공부할 수밖에 없었을까? 아마 서자라는 출신 배경에 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당시 서자들은 정식으로 관인(官 人 : 공무원)이 될 수 없었을뿐더러 과거 시험을 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홍길동전』에 수록된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고, 형을 형이라고 부를 수 없는 한(恨) 많은 삶'이라는 구절이 당시의 시대 상황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 또한 특이한 경우였다. 형과 자신이 서자였고, 동생이 적자였기 때문이다. 자손이 귀한 집안에서 태어난 어린 허준은 안 마 집안의 귀여움을 듬뿍 받으며 자랐을 것이다. 어엿한 고을 사또의 둘째 아들이었으므로 또래의 양반집 아이들과 어울려 놀기도 하고, 글을
다고 한다. 고귀한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온갖 호사를 누리다가, 결국 말똥을 치우는 사람으로 전락한 그가 허준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까? | 이에 비해 허준의 동생인 허장은 손 씨 부인의 아들로 적자였다. 그는 과거 시험에 급제한 후 벼슬길에 올라 나중에는 정삼품 당상관 통정대부에까지 올랐다. | 이러한 전후 사정을 종합해볼 때 허준은 10여 세의 어린 나이에 의학을 처음 배우기 시작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서자 출신의 허준이 아버지처럼 관직에 오르기 위해서는 무술을 익혀 장군이 되거나, 음경일 거세하고 내시가 되거나, 기술을 배워 해당 관직에 오를 수밖에 없었을 때문이다.
허준의 선택은 의외로 간단해진다. 자신을 서자로 태어나게 한 아버지에 대한 분노 때문에 무관의 길은 일찌감치 포기했을 것이다. 또한 태어난 그가 내시가 된다는 것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배우는 것 만남은 셈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의학이었는가. | 당시 양반들은 대부분 유학의 가르침에서 말하는 수신(修身)의 연장으로 의학을 조금씩 공부하고 있었다. 건강해야 높은 벼슬에 오를 날까지 기다릴 수 있고, 그 자리에 올라야 자기 뜻을 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못할 바에야 차라리 명의가 되어 뭇사람을 구제한다'라는 유의(儒醫) 철학이 시대의 유행이 되던 때가 바로 조선 중기였다. 그러므로 허준의 집안에서도 일반 양반들이 하던 양생법(養生法:일종의 질병 예방법)과 간단한 치료법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 허준은 어렸을 적부터 보고 배웠던 의학에 대한 친밀감 때문에 그 길로 입문하는 데 오랜 방황이 필요 없었다. 의학에 입문하던 날 허준이 꿈꾸었던 것은, 실력 있는 어이가 되어 모든 벼슬아치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日日
배우러 서당도 다녔을 것이다. 후에 그가 저술한 의학서를 볼 때 이때 허준은 꽤 높은 수준의 한문 실력을 익혔던 듯하다.
그러나 적자인 동생이 태어나면서 이러한 행복은 사라지고 만다. 집안의 모든 관심은 동생에게 쏠렸고, 10여 세의 허준은 그제야 자신의 출생 신분을 자각하게 된다. 귀염둥이에서 하룻밤 만에 천덕꾸러기로 변한 허준의 눈에 맨 먼저 비친 것은 아마 형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허준의 형에 대한 공식 기록은 족보에만 있다. 그는 사복시(司僕侍; 궁궐의 말을 키우던 곳)에서 말을 키우는 내승(內乘)이라는 말단 벼슬

허준의 참스승은 누구인가 허준의 참스승을 말하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내용이 있다. 허준은 20세 전후에 이미 서울 근교에서 명의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나 이 29세인 선조 7년(1574년)에 등제(登第:관인 명부에 이름이 올라감)되 면에서 정식으로 입궐했으며, 그 이듬해인 선조 8년에 안광익과 더불어 왕을 진맥 했다. 또 한 가지는 내의원으로 들어가 『동의보감』을 비롯한 10여 종의 저술을 남긴 사실이다. | 어떻게 불과 20세 전후에 서울 양반들을 매료시킬 정도의 의술을 구사할 수 있었으며, 일생 책 한 권 쓰지 못하고 죽는 의사들이 대부분이었던 시절에 방대한 저술을 남길 수 있었을까? | | 허준의 의학 입문 동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능력과 업적은 동기만으로 완성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렇다면 누군가 허준에게 신비의 의술을 전해주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는 누구인가. 『동의보감』이 도교 철학을 밑바탕에 깔고(특히 구경) 있다는 점에서 도가 계열의 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 허준의 집은 서울 근교에 있었으므로 어릴 적부터 서울을 드나들었을 것이다. 당시 서울에는 양반뿐만 아니라 장사꾼, 승려, 신지식인, 도사(道 士)도 함께 모여 있었다. 또한 구가하던 전국의 명의들도
이때 동대문 밖에 사는 의술이 높은 어떤 도인(道人)에게 제자가 되기를 간청하면 누구든지 뜻을 이룰 수 있다는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당시 동대문 바깥에는 이인(異人)을 자처하는 몇몇 도인들이 살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 이런 인연으로 의사가 된 사람에는 명종 4년(1549년) 의과에 합격해서 내의원에 들어간 후 태의(太醫) 벼슬을 지낸 양예수(楊禮壽)가 있다. 그는 출신이 매우 낮은 사람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의학에 관심을 두고 있었지만, 스승을 만나지 못하다가 우연히 동대문 밖에서 장한 울(張漢)이란 도인을 만나 제자가 되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의술을 배운 그는 나중에 『의림 촬요(醫林撮要)』를 저술하면서 자신의 의술이 스승인 장한응으로부 터 나온 것임을 밝혔다. 그렇다면 허준도 이런 경우가 아니었을까?
양예수에게 의술을 가르쳤던 장한울이란 사람은 산인(山人)으로 불리던 인물로, 당시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과 더불어 우리나라 도교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었다. 장 한울과 서경덕은 우주의 궁극적인 원리인 도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으나 둘의 연구 과정과 실천 방식은 사뭇 달랐다.
염담허무(活淡虛無)를 즐기던 서경덕은 사람들을 피하고자 개경 근처의 화담에 조그만 정자를 짓고 살았다. 우주의 이치를 깨닫기 위해 깊은 사색을 즐기던 그였기 때문에, 개성의 명물이던 황진이도 그를 유혹하려다 오히려 그의 제자가 될 정도였다. 그의 제자로는 토정비결로 유명한 토정 이지함(李之)이 있다.
그러나 장한울은 백성들과 함께 살면서 실질적이고 민족적인 측면을 중시하였다. 그래서 그는 서울 동대문 근처에 자리 잡고 후학들과 함께 기거하며 생활 속의 도를 실천하였다. 또한 베풀 거 나, 집안에 들어온 잡귀를 물리치는 등 기이한 행적으로 유명했다.
동대문 밖에서 허준이 만났던 인물은 누구였을까? 그는 백발의 장 환웅이었을 가능성도 있고, 장 한울의 제자였을 수도 있다. 또한 서
서울을 거점 삼아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그러므로 10세 전후의 허준은 서울에서 소문난 명의를 한 명씩 찾아다니며 의술을 배우려고 했을 것이다. | 당시의 의술은 철저히 도제식(徒弟式: 스승과 제자의 일대일 교육)으로 만만 전수되고 있었다. 스승으로 삼은 한 분을 평생 섬기며 온갖 허드렛일을 해야 비로소 기술이 전수되던 그때, 선뜻 그에게 의술을 가르친 명의는 없었을 것이다. 고을 사또를 역임한 부친의 힘을 빌렸을 수도 있겠지만, 서자라는 한을 품고 있던 허준이 아버지에게 부탁했을 리도 없다. 그러므로 꽤 많은 시간 동안 허준은 헛걸음만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