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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 허준의 일화

경덕 사이를 오가면서 미래를 내다보던 이지함 일 수도 있다. 그러나 행적을 밝히지 않는 도인들의 특성 때문에 이 부분은 영원한 비밀로 남아 있다. 다만 현재로서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장 한울의 제자나 양예수이다. 왜냐하면 북창 정련과 양예수, 유의태와 허준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연결고리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어린 허준을 한눈에 알아보고 큰 의사로 만들기 위해서 흔쾌히 제자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유의태와 허준
필자는 어떤 형태로든 유의태가 실존했을 것이고, 허준과 인연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대한 설화 내용이 꽤 오래전부터 한의계 내부에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꾸민 이야기치고는 너무 생생하다. | 두 사람이 만났다면 서울이나 지리산 근처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유의태가 서울에 살지 않았기 때문에, 의술을 전수해야 하는 특성상 지리산 근처에서 만남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기간은 일 년 미만으로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고 추정된다. 왜냐하면 배운 10대 후반의 허준이 전국을 답사한 후, 20세가 되기 전에 다시 서울로 올라와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 만남이 미리부터 준비된 것인지, 아니면 우연인지는 알 수 없다. | 유의태는 허준에게 자신의 의술을 아낌없이 가르쳤다. 특히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남부 지역의 자생 약초를 이용한 질병 치료법에 초점을 두었을 것이다. 그런데 유의태는 왜 마지막에 가서 자신의 몸을 해부하도록 하였을까? 허준은 정말 유의태의 몸을 해부했을까? 만약 했다면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가 죽음으로써 허준에게 당부하고자 했던 바는 무엇이었을까?
소설 『동의보감』에서는 유의태가 반위(反胃)라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반위라는 병은 음식을 먹고 난 후 일정 시간이 지나면 토하는 병일뿐이다. 일명 얼결(同病)이라고 하는 이 병은 흔하게 볼 수 있는 병이며, 간단한 치료로도 완치할 수 있다. 설령 유의태가 위 암(中院驪] 같은 무서운 병에 걸렸더라도 그의 실력이라면 치료를 통해서 얼마든지 완치가 가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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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여 세의 허준은 스승으로부터 의술을 철저하게 배운다. 그리고 10대 후반에 당시 도인들의 풍습에 따라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며 명상을 했을 것이다. 또한 약초를 직접 캐면서 배운 것을 복습했을 것이다. 남달리 의술에 대한 집념이 강한 허준은 이때 각 지역에서 은둔하고 있는 명의로부터 또 다른 의술을 배웠을 가능성이 있다. 허준과 유의태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유의태는 유씨 집안의 족보에도 없는 신비의 인물이다. 왜냐하면 족보가 보관되던 경남 진주가 왜란의 격전지여서 전란 전후의 기록이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서는 유의태가 정말 생존했던 인물인지조차 알 수 없다. 현재 한의계의 공식 입장은 '유의태는 가공의 인물' 이란 것이다.

| 해방 이후 본초학자였던 신길 구는 그의 저서 『신 씨 본초학』에서 허준의 스승을 유이태(劉以泰)라고 했다. 유이태는 경남 산청과 밀양에서 실존했던 인물로 탁월한 의술의 소유자로 전해진다. 그러나 그는 허준이 죽고 나서 약 백여 년 후에 태어난 사람이다. 그러므로 허준 설화의 주인공이 될 수는 없다. 유의태는 정말 가공의 인물이었을까?
또한 중요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계를 이미 오랜 옛날에 발견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해부된 간장보다. 는 살아 있는 사람의 몸에서 나타나는 간장의 기능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감추어진 구조 속에서 바깥으로 드러나는 현상을 파악하여 실체

해서 섬서(陝西) 지방이
의학
에 접근하는 방식을 '장상(藏象)'이라고 한다. 이러한 장상을 연구해서 발전시킨 의학이 바로 한의학이므로, 그들이 의술을 위해 해부를 했다는 것은 학문적 특성에 어긋난다. | 유의태와 허준이 이런 점을 몰랐을 리 없다. 특히 허준의 『동의보감. 에 인용된 해부학 자료는 이미 천 년 전에 간행되었던 내용이다. 무엇 때문에 유의태는 허준에게 자신의 몸을 해부하라고 했을까? | 이 점에서는 두 가지의 추측이 가능해진다. 하나는 의학적 혼란을 겪고 있는 허준을 바르게 일깨우기 위하여 유의태가 충격요법을 쓴 것이라는 가설이다. 왜냐하면 의학이 우리나라 전래의 도교 의학과 깊은 연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주의 본질을 의학에 접목한 도교 의학은 현실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한의학의 특징인 장상을 부정하고, 도교 의학에 너무 몰입되어 마치 도사처럼 변해가는 허준을 유의태는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결국 의학의 본질이 형이상학적인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몸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깨달음을 허준에게 주기 위해 자신의 몸을 해부하라고 했을 것이다.
1시(陝西) 지방의 의학으로 자리 잡았다. 이에 중국의 의학이 남북으로 나누어져 발전하였다. 우리나라는 비록 동이로 치
치우쳐 있지만 1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져 왔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의학을 동의(東醫)라고 한다.”
유의태는 중국 의학과 다르게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우리나라 의학의 시 포자였을 수 있다. 아마 지리산에서 캔 약초로 질병을 치료하면서 우기 이학의 자주성과 중요성을 몸소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삼국시대부터
시대를 거치면서 형성된 향약(鄕藥) 의학이, 조선 시대에 물밀 듯 밀 드는 중국 의학에 떠밀려 점차 명맥조차 유지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 것도 유의태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확실한 의술 공부를 위해서 해부에 집착해 있는 젊은 허준에게 유의태는 자신의 늙은 몸을 내어주며 우리 의학의 발전을 당부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허준은 『동의보감』을 비롯한 여러 저서에 향약의 사용법 및 언문 (한글) 표기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시도는 이후 의학서를 출간한 후학들에게 이어져 우리 의학의 상징처럼 굳어졌다.
비밀에 싸인 허준의 입시 결과 과정
| 이런 과정은 마치 황희 정승이 술을 과음하던 아들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 이른 새벽 문 앞에서 술 취한 아들을 기다렸다가 마치 손님을 대접하듯 했다는 일화와 비슷하다. 또한 훈계할 때 어머니가 아들에게 회초리를 주면서 자신의 종아리를 때리라고 명했던 것과 일맥상통 통한다. 허준은 이 과정을 거치면서 진정한 의학의 도란 바로 정신과 육체의 합일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 두 번째는 살아 있는 몸을 해부하여 의학의 실체를 알고자 했던 허준의 집념을 유의태가 우리 의학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키려 했다는 가설이다. 이것은 허준이 쓴 『동의보감』의 집례 편에서 엿볼 수 있다.
전국의 명산과 지역 명의들을 만나고 돌아온 20대 초반의 허준은 서울에서 의술을 펴기 시작한다. 유교와 도교를 바탕으로 우리나라 전통의 의술까지 두루 섭렵한 그의 실력은 이미 명의의 경지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비록 젊은 나이였지만 서울의 양반들에게 명의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 그리고 드디어 29세가 되던 해에 등재되어 궁궐로 입궐하게 된다. 그 서나 여기에는 또 하나의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다. 양천 허 씨 족보에는 인간이 갑술년(1574년)에 시행된 의과에 급제하고 등재를 했다는 기록
"이동원은 북쪽의 의사로 나겸포에게 의술을 전해서 강절(江浙) 지방의 의학으로 자리 잡았다. 주단 계는 남쪽의 의사로 유종 후에 의술을 전
이 있다. 그러나 학자들은 그 당시 의과 시험을 시행했다는 객관적인 기록이 없으므로 누군가의 추천으로 올리고 입궐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렇다면 누가 허준의 입궐에 도움을 주었을까? | 현실적으로 가능성 있는 사람은 세 명뿐이다. 허준의 젊은 시절이 기록된 『미암일기 초에는 허준의 입궐 과정이 그려져 있다. 이에 따르면 허준을 신뢰하던 유희춘이 이조판서 혼담에 건의하여 허준을 내의원에 들어가도록 했다고 한다. 홍단은 조선 중기 때 사람으로 주요 관직을 두루 거친 강직한 성리 하자였다. 그는 평소 무분별한 인재 등용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그가 친분 있는 사람의 입궐 청탁을 순순히 들어주었을까? 그는 허준이 내의원에 들어간 지 2년 만에 노환으로 세상
직명이 기록되어 있다. | 그렇다면 허준은 입궐 후 최소 일 년 이상 정식 관직을 맡지 못했다는 겨로 이 나온다. 이름뿐인 관인 생활을 일 년간 하다가 선조의 병을 진맥한 후에야 비로소 관직을 부여받고 내의원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의과에 합격한 사람들에게 3~6개월 정도의 궁궐 법도를 가르친 후 곧바로 관직을 부여하는 전례를 참고했을 때, 허준의 입궐 과정에는 분명 비밀이 숨어 있다.
참고로 안광익에 대한 자료는 없으므로 그의 행적을 알 수 없다. 다. 마 허준과 함께 왕을 진찰했다면 그 또한 상당한 의술의 소유자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므로 안광익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가 나온다면 허준의 일대기를 다시 수정해야 할지 모른다.
거듭된 출세와 정치적 고난
을 떠났다.
그렇다면 허준의 스승 중 한 사람으로 추정되고 있는 양혜수는 어떠했는가. 당시 양혜수는 이미 내의원에서 상당한 실력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만약 허준의 스승이 장한울이나 그의 제자였다면 양혜수에게 허준의 입궐을 도와주도록 부탁했을 것이다. 또한 허준의 스승이었다. 면 이 일은 더욱더 쉬워진다. | 또 한 명은 『동의보감』 편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유의 정작이다. 정작은 북창 정련의 동생으로 형제 모두 도교의 영향을 받은 인물이다. 그의 부친인 정순붕은 훈구파의 거두였지만, 관료들의 견제로 결국 권력에서 밀려나 정치적인 탄압을 받고 있었다. 이에 형제는 권력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연단술(練丹術)을 비롯한 각종 도술 연마에 힘을 쏟았다. 그의 학문과 의술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들은 선조가 그를 총애하여 혜민
허준은 내의원에서도 특별한 과정을 거친다. 서민 치료를 담당하던 해 만 수와 궁궐 내부에서 왕족만을 전담하던 내의원을 오가던 허준은 선 조 14년(1581년)에 왕명에 따라 진맥에 대한 의학서를 쓰게 된다. | 당시 왕명에 의해 책을 쓴다는 것은 단순히 병 고치는 의사로서 대접받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의학을 선도할 지도자로 육성된다는 데 의미 가 있었다. 이때 쓴 책이 『찬도방론 맥 결집성』이란 진맥 서로 허준의 최초 저술이다. 허준이 역사의 조명을 받기 시작하는 것이 바로 이때부터이다.
선조 23년(1590년)에 허준은 천연두에 걸려 죽어가던 왕자의 완치 시 킨다. 이때 어의를 비롯하여 수많은 내의원 의사들이 치료하였으나 고치지 못하였다. 허준은 뛰어난 의술과 정성으로 왕자를 며칠 만에 완치 시켰고, 이에 왕이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정삼품 당상관에 해당하는 가자(加資) 벼슬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그의 빠른 출세를 시기한 수많은 관
서 교수로 임명하였다. 그가 허준의 입궐에 도움을 주지 않았을까? |
허준에 관한 최초의 공식 기록은 선조 8년(1575년) 2월 15일 자 실록이다. 허준이 명의 안광익과 더불어 왕을 진맥했다는 내용이 있으므로 이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사실은 실록에 허준의 공식 관직명이 서술되지 않고 다만 '명의'라고 기록된 점이다. 이후의 실록 자료에는 허준의 관